저자 : 박일환 / 출판사 : 뿌리와이파리 / 2015.10.05


번역 공부를 하지는 않고 있지만, 번역을 하려면 외국어 뿐만 아니라 우리말 실력도 갖추어야 한다. 외국어로 씌여진 책이나 문서를 우리말로 옮겨 적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말과 관련된 책을 도서관에서 가끔 빌려 읽곤 한다.(물론 읽고 나서 다 잊어버린다는 게 문제겠지만)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책 제목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번역 관련 책에서도 참고하라고 되어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이 문제라고? 국립국어원에서 만든 사전이면 우리나라 국어사전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책인데? 그런데도 "미친"이라는 말이 들어갈 정도로 문제라고? 에이 설마. 책 한 권에 담길 정도나 되려나?

순간적으로 계속된 호기심에 충동적으로 이 책을 빌리게 되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의 문제점은 목차를 보면 어떤 종류의 것들인지 가늠할 수 있다.

제1장 한자어를 사랑하는 국어사전 

       - 우리말과 한자어, 한자어로 가득한 뜻풀이, 달걀과 계란, '-적'을 사랑하는 국어사전, 한자어가 많은 이유

제2장 외래어를 사랑하는 국어사전 

       - 너무나 낯선 외래어들, 여전히 남아 있는 일본 한자어들
제3장 이상한 뜻풀이 

       - 뺑뺑이를 돌리는 국어사전, 알 수 없는 뜻풀이, 부족하거나 잘못된 뜻풀이, 배추를 통해 본 국어사전, 식물 이름 뜻풀이, 동물과 어류 이름 뜻풀이

제4장 사전에 없는 말 
제5장 신어(新語)의 문제 
제6장 차별과 편견을 부추기는 국어사전

       -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국어사전, 노동자를 꺼려하는 국어사전, 남녀 차별을 부추기는 국어사전

제7장 어설픈 백과사전 흉내 내기 - 인명(사람이름)에 대해, 오지랖 넓은 국어사전, 복합어의 표제어 선정 기준
제8장 낱말 분류 항목에 대해 
제9장 방언의 문제 
제10장 순화어의 문제 
제11장 북한말의 문제 
제12장 용례와 출처에 대해 
제13장 그 밖의 문제들 - '불란사'라는 말의 유래, 바른손과 학부형, 한자를 사용하는 외국 사람의 인명 표기, 자투리 의문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사전은 오직 책으로 되어 있어서, 각종 사전을 들고 다니다가 모르는 낱말을 만나면 그 뜻을 찾아야 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낱말 하나의 뜻을 찾기 위해서 최소 다른 낱말 서너개의 뜻을 찾아야만 이해가 될까 말까 했던 일. 가끔 설명에 씌여진 낱말이 사전에 없어서 그냥 넘어가야만 했던 일. 국어 사전인데 한자어가 너무 많은데, 그에 비해 순우리말은 별로 없는 게 너무 이상했던 게 떠올랐다.

위 목록을 보면 한번쯤 사전을 찾아본 사람들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텐데, 각 항목의 예시는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이다. "미친"이라는 책 제목은 너무 적나라하게 비난하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실제로 책장을 넘길때마다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게 사실이다. "올림픽조직위원회"의 뜻을 설명하는 데 쓰인 "개최국"이란 낱말이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다니? "흑염소"가 사전에 없다고? 왜 "표준국어대사전"이 다음에서 만든 사전보다 부실한 거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표준국어대사전"은 국립국어원에서 만든 것이니만큼, 사람들이 영어를 공부할 때 영영사전을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말을 배우는 사람들도 이 사전을 쓸 텐데....그들이 이런 사전을 쓴다는 걸 생각하면 절로 부끄러워 진다.


그렇다면 왜 "표준국어대사전"이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해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표준국어대사전이 나오기 전에는 민간 출판사나 대학 연구소가 한국어 사전 편찬 사업을 주도해 왔으나, 기존 한국어 사전들이 표제어 표기가 불일치 하는 등 일관되지 않은 면이 있어서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표준국어대사전을 편찬하게 되었으며, 1999년 10월 1일 초판본이 출판되었다. (출처:위키백과)

그래서 내 맘대로 추측해보건대, 당시 이처럼 중요한 국가사업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아마 70년대에 많은 공부를 하신 분들일테고, 그렇다면 여기에 참여하신 분들은 일본어로 번역된 책과 논문을 많이 읽으셨을 것이다. 물론 일상 생활에서 우리말도 많이 쓰셨겠지만, 아무래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보다는 한자어나 번역체로 씌여진 문장을 더 많이 접하셨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글을 쓸 때 무의식중에라도 한자어나 번역체가 많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여러 사람이 부분부분 만들어온 내용을 편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가 많은 것도, 대중들이 알지 못하는 서양의 지명과 인명들이 담겨 있는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을까? 당시에는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으니까 알게 모르게 담겨 있는 차별의 언어들 또한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되지 않을지? 그렇게 생각해보면 "표준어"의 정의가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계급을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것도 같다.


그렇다면 표준국어대사전의 문제점들이 고쳐지지 않는 것일까? 그건 우리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문제는 있지만 해결하려고 덤비면 골치만 아프지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으니까 굳이 나설 이유가 없다. 그냥 놔둬도 나라가 망하거나 하루 밥벌이 하는 데 당장은 문제가 없다. 그러니 문제제기가 있어도 대충 넘어가면 그만이다. 나중에 급해지면 그 때 해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니 표준국어대사전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본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리고 어디 숨고 싶었다.

더구나 이건 우리말과 관계된 일이다. 일제시대에 왜 일본인은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했는가? 말에는 얼이 담겨 있고, 말은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그걸 통해서 사람이 움직이면 그것이 문화가 되고, 그 문화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만들기 때문이다. 당장 사전에서 사용된 차별의 언어들을 보면 그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다.

모름지기 "표준국어대사전"이라면 우리말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고, 우리말이 계속해서 살아서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본인의 생활을 다 하면서 두 달만에 책 한권을 만들 정도의 오류를 찾아냈다고 한다. 작가의 지적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많은 문제점이 있다면 제대로 고쳐야 할 일이다. 국립국어원이 제대로 마음을 먹는다면 못 할 일이 아닐 것이다. 최소한 사전에서 사용하는 낱말은 모두 담아야 하지 않을까.


호기심에 펼쳤다가 생각치도 못한 충격을 안겨준,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책, "미친 국어사전" 

우리말을 사용하는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덧1) 7년을 들여 만들었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이렇게 문제가 많다는데, 고작 1년 만에 탄생하게 될 국정 역사교과서가 문득 걱정되는 건 아마도 나의 오지랖이요 쓸데없는 걱정일 것이다. 그렇겠지?

 

덧2) 홍명희의 "임꺽정"이 우리말의 보고(寶庫)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기회가 되면 우리말을 배울 겸 한번 정독해봐야겠다.


덧3) 내가 대기과학(기상학)을 전공했지만, 내 전공에서 쓰이는 국적불명의 일본 한자어 출신의 말들은 한번에 들어서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문제는 바꿔서 부르고 싶어도 어떻게 바꿔야 할 지 도통 모르겠다는 거다. 날씨 뉴스에 사용되는 단어만 봐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구름 많음"이랑 "흐림"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기과학도 전문용어의 재해석이 필요한 분야 중의 하나다. 부디 나보다 학식이 높으신 분들께서 꼭 노력해주시길 바란다.


미친 국어사전
국내도서
저자 : 박일환
출판 : 뿌리와이파리 2015.10.05
상세보기




'책이야기 > 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친 국어사전 - 박일환  (0) 2016.03.20
뉴스의 시대 - 알랭 드 보통  (0) 2016.03.19
서민적 글쓰기 - 서민  (2) 2016.03.01
나도 번역 한번 해볼까? - 김우열  (0) 2016.02.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