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싸움을 못 한다. 주먹을 쓰는 싸움은 물론이고 동생과의 말싸움에서도 이겨본 적이 없다. 흥분해서 이 말 저 말 던지다가 나중에 이불킥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싸움이 생길만해지면 도망가거나 그냥 내가 죄인이오 해버리는 일이 많았다.
즐겨듣는 팟캐스트 xsfm의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최근에 "싸움의 기술"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싸움을 잘 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는 욕구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뿔사. 이 책은 싸움을 잘 하는 비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싸움을 왜 하는지, 그리고 싸움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영화 "쿵푸허슬"의 <여래신장>같은 비급을 지닌 도사님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무술 젬병들에게 도복 입는 법, 명상하는 법, 낙법부터 알려주는 무술도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평소에 운동은 하나도 안 했던 사람이 비급을 얻었다고 해서 바로 비급을 익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책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여태까지 나는 싸움은 싫어하는 사람들끼리만 하는 것인줄 알았다. 싸움을 하고 나면 감정이 상해서 그 사람 얼굴을 제대로 못 볼 것만 같았고 실제로 분한 마음에 몇 주간 치를 떨었던 적도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싸움은 인연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계속 만날 필요가 없는 관계라면 싸울 필요 없이 그냥 인연을 끊으면 된다."라고 말한다. 싸움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 문화/가치관/실행방법이 충돌할 때 그 차이를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함으로써 생기는 충돌이며. 최종적인 목적은 그 사람과 협상을 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이어갈 필요가 없는 사람과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싸움은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일이다. 상대에게 자신을 투영하거나, 화를 내는 방식에서 나라는 사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힘든 게 이 부분인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시작해서 끝낼 것인지 잘 계획해야 한다. 금기를 건드리거나 싸잡아 싸우는 등 선을 넘지 말아야 하고, 화를 일정 수준으로 컨트롤 해서 잘 싸우고, 최종적으로는 협상을 해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싸움의 언어는 은유로 가득한 시와 같다. 싸울 때 서로에게 하는 말들이 전부가 아니라 그 너머에 화자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숨어있다. 그러나 싸움이 일어나면 사람은 긴장하게 되고 상대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때로는 잠시 휴식기를 가져보기도 하고, 장소를 바꾸거나 판을 엎고 새로 짜는 등의 방법으로 적정 수준의 화를 유지하면서 싸움의 목적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 내가 거쳐온 시간들을 떠올려봤다. 나를 잘 알지 못하고, 나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 그렇기에 때로는 과거의 나는 비겁했고, 나를 드러내지 않고 남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며 옹졸했다.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결국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제대로 싸우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마무리도 없었고 관계는 악화되기만 했다.

이 책을 읽고난 지금, 내가 변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여래신장>을 익히기는 커녕 도복이나 제대로 입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 누군가와 부딪히는 일이 생긴다면 잘 싸워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일단 반발자국 정도는 앞으로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xsfm 그알싫의 <싸움의 기술> 남은 에피소드를 들으면서 복습해보면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책이야기 > 2021'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탑승을 시작하겠습니다 - 정미진  (0) 2021.01.31
김지은입니다  (0) 2021.01.25
한자와나오키 2권 - 이케이도 준  (0) 2021.01.24
임계장 이야기  (0) 2021.01.19
거룩한코미디 - 곽영신  (0) 2021.01.02

+ Recent posts